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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S.E.S와 누나부대의 출현 (321p~332p)

H.O.T.의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르고 나자 이수만은 곧바로 걸그룹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1990년대 전반기에 여러 걸그룹들이 출현했지만 거의 모두가 몇 개월 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아마추어 비행기 동호인들이 제작한 모형항공기가 공중에 잠시 붕 떴다가는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 하는 식이었다. 음악적 재능이나 제대로 된 댄스 훈련 없이 오로지 외모 하나만 믿고 무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체공력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잠깐의 눈요깃거리는 되었을지언정 팬들의 선망의 대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준비 안 된 등장과 때 이른 퇴장의 악순환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요계에서는 '한국 음악시장은 걸그룹의 무덤'이라는 자조적 표현이 공공연히 나돌 지경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해온 이수만은 기존의 걸그룹들에게는 춤과 음악 모두에 치명적 결함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음악시정에서 통용될 만한 실력을 키우지 않고 포장지에 불과한 외모만 중시한 것을 패착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점들만 보완한다면 걸그룹이 점유할 시장이 충분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관하는 바로 그곳에서 이수만은 긍정의 씨앗을 싹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걸그룹을 출시하겠다는 이수만의 계획은 대단히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사실 그가 걸그룹 프로젝트를 SM 내부에서 제안한 것은 1996년 가을쯤이었다. 이 시기는 H.O.T.가 대중적 지지기반을 아직은 확고히 다지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을 때였다. H.O.T가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 무렵, 대성기획(※현재는 DSP미디어이다. 1991년 설립돼 SM과 오랜 세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 그룹을 다수 배출했다)에서 젝스키스라는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을 내놓았다. 활동시기가 겹친 두 팀은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젝스키스가 H.O.T.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와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남들이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걸그룹 카드를 한가하게 꺼냈으니 사람들로서는 이수만의 계획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걸그룹 만들기 역시 이제까지 이수만이 추구해온 저돌적인 시장개척의 길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SM 내부에서는 꼭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감이 곧 감돌게 되었다. 이수만은 왜 걸그룹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지를 차분한 어조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였다.

 

"여학생들이 H.O.T.를 좋아하는데 남학생들이 뛰어난 실력의 걸그룹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미국과 일본 시장에서는 걸그룹이 인기를 끄는데 유독 한국 시장에서만 고전하는 것은 이제까지 나온 걸그룹들에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 그 한 가지 예로 우리나라 걸그룹들은 프로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수만은 프로라면 프로답게 최고가 되려는 끈기와 집념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걸그룹들은 대개가 남성 가수들의 보조적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음악시장 전반에 대한 이수만의 해박하고 논리정연한 설명을 듣고 나자 SM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SM의 캐스팅 담당자들은 음악적 재능과 춤 실력을 두루 갖춘 여학생들을 찾아 금광을 채굴하는 심정으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수만 역시 자신이 제안한 걸그룹 프로젝트에 적합한 10대 소녀들의 발굴 작업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수만은 SM의 걸그룹 사업 책임자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팀으로 미국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이고 있던 3인조 걸그룹 TLC를 지목했다. 1991년에 데뷔한 TLC는 티보즈, 레프트 아이, 칠리 세 멤버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지은 팀이다. TLC는 1995년 Creep과 Waterfalls라는 곡으로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Waterfalls의 경우에는 그해 7월과 8월에 걸쳐서 연속 7주간 정상에 오를 정도로 남자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이수만은 1994년 데뷔해 Stroke You Up이라는 곡으로 정상급 실력을 과시한 바 있는 체인징 페이시스라는 리듬 앤 블루스 여성 듀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국 팝음악의 흐름을 줄줄이 꿰고 있던 이수만은 이들 여성그룹이 부르고 있는 흑인 음악 장르인 뉴 질 스윙(*뉴 잭 스윙의 여성 버전으로 주로 흑인 음악의 여러 갈래인 R&B, 힙합, 소울, 펑크 등 다양한 현대 음악장르를 융합한 형식을 띤다)에 특히 주목하고 있었다. 이수만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에서 H.O.T.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미국 시장에서 그 진가가 확인된 흑인 여성 그룹들을 낱낱이 분석한 다음 한국 시장의 미래를 개척한 걸그룹 프로젝트에 응용해나갔다.

 

이수만이 프로젝트의 얼개를 제시하자 SM의 음악적 교사 겸 책사 역할을 맡고 있는 유영진이 TLC에 대한 정밀한 검토에 들어갔다. 유영진은 이수만이 이야기를 하기 전부터 이미 TLC와 체인징 페이시스의 음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였다. 걸그룹 육성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자 그는 이 그룹들의 음악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으며 심도 있게 연구했다. 유영진은 음악을 탐구할 때면 수백 번이라도 되풀이해 들어가며 기꺼이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근성을 발휘했다. 그는 뉴 질 스윙의 호흡을 한국적 박자로 바꿔줄 단서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어떤 면면의 소녀들로 그룹이 구성되는가에 따라서 구체적 느낌이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유영진이 만들어야 할 노래들이 대중들의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대원칙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했다. 

 

이수만은 걸그룹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SM 브랜드의 걸그룹은 국내를 넘어 아시아 시장마저 겨냥해야 한다는 원대한 비전을 피력했다. 1990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1992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아래 죽의 장막을 걷어낸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대 중국 무역액이 매년 전년대비 급신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수출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국 현지에 교두보나 연결고리를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수만은 이와 같은 대외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회의 때마다 역설하였다. 그는 무엇을 하든 궁극적으로는 중국 시장을 노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세계 인구의 25%를 점유하는 중국 시장의 잠재력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거대하다는 이수만의 설명은 아직은 해외업무 경험이 부족한 SM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이수만은 자신 있게 단언했다.

 

"중국 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할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대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무대에 설 수 있는 인재들은 찾아내서 키우는 것입니다." 

 

이수만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좁은 바닥에서 죽기 살기로 아둥바둥 경쟁하기 보다는, 광활한 국제시장으로 진출하자는 호소였다. 이수만이 중국 시장을 거론하고 있을 즈음 한국의 유명 가수들은 일본과 대만 무대에 빈번히 서고 있엇다. 그 중에서도 가왕 조용필의 활약이 특히 대단했는데 그의 콘서트는 매번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조용필 이외에도 김연자, 계은숙 등이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까닭에 일본 진출은 크게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다.

 

이수만은 해외시장을 개척할 때는 언어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서 활동할 연예인이라면 말이 통해야만 그 나라 대중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음은 대단히 자명했다. 하지만 언어는 하루아침의 노력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몇 년 간은 해당 국가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지속적이고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이수만은 뉴 질 스윙이라는 장르에 필요한 영어는 물론 일본어와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멤버들을 규합하는 것을 걸그룹 연습생 발굴의 지침으로 설정했다.

 

H.O.T.가 인기그룹으로 부상한 덕분에 SM의 캐스팅 작업은 예전과 비교해 상당히 수월해졌다. H.O.T.의 성공에 고무된 수많은 청소년들이 SM의 오디션 무대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뒤졌던 H.O.T. 캐스팅 때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었다. 더군다나 재능 있는 아이가 어디 있다는 연락이 회사로 자주 온 덕분에 유능한 기대주들을 빨리 찾을 수가 있었다. 이수만은 걸그룹 한 팀 정도만 더 스타덤에 올려놓는다면 캐스팅 작업에 날개를 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한 계산은 1997년에 들어와 H.O.T.가 전국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클럽을 보유하게 되면서 조금 더 일찍 현실화되었다. 

 

백방으로 캐스팅 작업을 펼친 끝에 드디어 이수만은 소망하던 걸그룹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뽑힌 연습생들은 전부가 예쁘고 깜찍했다. 외모 한 가지만 본다면 이전의 걸그룹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국어 담당 최성희, 영어 담당 김유진, 일본어 담당 유수영 모두가 수천 명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SM의 연습생으로 당당히 선발되었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근성을 갖추고 있었다.

 

안양예고를 다니는 최성희는 학교 영화축제 때 게스트로 출연해서 솔로로 노래를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이수만이 보낸 SM 캐스팅 디렉터 눈에 단박에 띄었다. 그런데 사실은 학교 측에서 그녀가 무대에 선다는 것을 SM에 사전에 귀뜸해준 결과였다. 그녀는 이수만 앞에서 치룬 오디션에서도 당당히 실력을 발휘했다. 

 

김유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 손에 이끌려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인 미국령 괌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계속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했다 . H.O.T.의 데뷔 초기부터 팬이기도 했던 그녀는 마침 이수만과 H.O.T. 멤버들이 화보집을 촬영하려고 괌에 와 있었을 때 H.O.T. 전담 매니저인 김수현에게 H.O.T.의 사인을 받고 싶다고 부탁을 하게 되면서 SM과의 인연을 트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귀국한 김유진은 자신이 SM에 보낸 사진과 비디오 자료가 심사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정식으로 연습생이 되었다.

 

유수영은 도쿄 인근의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였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한국으로 들어와 외국인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SM에서 유수영을 캐스팅할 때 그녀는 얼마후 god의 멤버로 활동하게 되는 데니 안, 손호영 등이 참여하는 혼성그룹의 일원으로 이미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정식으로 계약서에 서명만 하지 않은 상태였던 유수영은 롯데월드 지하상가에 놀러갔다가 SM 캐스팅 담당자의 눈에 우연히 들게 되어 이수만 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수만은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멤버도 한 명 선발하여 무척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도중에 하차하게 되면서 트리오로 편제가 정리되었다. 중간에 그만둔 중국 시장을 겨냥한 멤버 이외에도 미래에 섹시 여가수의 아이콘으로 등극할 여고생 한 사람이 SM의 연습생으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뭇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바로 이효리였다. S.E.S.와 걸그룹 시장의 쌍벽을 이루는 핑클의 리더가 될 이효리는 원래 H.O.T.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녀의 스타성을 발견한 캐스팅 디렉터 김수현이 SM 사무실에 재목감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이효리는 이수만의 걸그룹 프로젝트 연습생에 포함됐지만 그녀는 곧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대한민국 연예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해프닝이었다. 

 

그녀가 H.O.T.의 라이벌 기획사인 이호연의 대성기획 품에 안긴 것은 한국대중음악사의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호연은 이수만처럼 아이돌 시장을 개척한 인물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데 그는 늘 이수만이 한발 앞서서 내놓은 그룹에 비교되는 그룹들을 곧바로 데뷔시키는 빠른 2등(Fast Follower) 전략을 추구하였다. 이수만은 최성희에게는 바다, 김유진에게는 유진, 유수영에게는 슈라는 예명을 준 다음, 이 이름들의 이니셜을 따셔 팀의 명칭을 S.E.S.로 정하였다. 브랜드 탄생의 공정만 보자면 사실상 TLC의 한국 버전이었다. 

 

유영진은 일류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착실하게 굳혀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노래인 '그대의 향기'와 H.O.T.의 노래를 만들었던 경험을 되살려 이수만의 든든한 브레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냈다. S.E.S.의 세 10대 소녀들이 가요계의 요정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앨범 제작 작업에 열과 성을 다해 매달렸던 것이다. 

 

유영진이 수집하고 정리하여 재해석한 뉴 질 스윙은 흑인 음악 특유의 애절하면서도 경쾌한 감각이 묻어나는 I'm Your Girl에서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이수만이 프로듀싱한 첫 번째 아이돌인 현진영 1집에서 SM 관계자들이 모두 나서서 재킷에 기록을 남긴 것처럼 S.E.S. 1집에 담긴 특별한 의미는 힙합의 특성이 가미된 I'm Your Girl의 도입부의 랩에 기록되었다. 다음은 S.E.S.에 뒤이어 가요계에 데뷔하는 남성 6인조 아이돌 그룹 신화의 멤버가 될 재미교포 출신의 에릭(문정혁)과 앤디(이선호)가 랩으로 부른 가사다.

 

Yeah! What's up What's up S.E.S!
We open up the new Chapter of funky New Jill Swing!
Here we Come! Here we Come! Come on!
I like S.E.S ya'll (Yes S.E.S ya'll)
We like S.E.S ya'll (Yes S.E.S ya'll)
You Never don't stop You Never don't Quit!
Kick out some sounds of the Hip-Hop Bear!
Now clap your hands everybody-
Now Move your feet everybody-
To the Left (to the left) 
To the Right (to the right)
Now Bring it back Fat rhythm of the free style!

 

SM은 S.E.S.가 뉴 질 스윙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면서 대중이 그들의 노래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도입부에서 격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부분은 걸그룹 시장을 블루오션으로 만들겠다는 이수만의 결의문으로 읽히기도 하고, 유영진이 리듬 앤 블루스에서 정상급 작곡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성명서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수만의 최종적 목표는 텔레비전 시청자였다. 영상매체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이수만식 전략의 중점은 이번에도 역시 최고 수준의 춤에 그 성패가 달려 있었다. 이수만은 박재준이 빚어내는 역동적 안무를 신뢰했다. 박재준은 걸그룹 멤버들을 위해 H.O.T.에게 부과했던 것 이상의 고강도 훈련 스케쥴을 짜놓았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그녀들의 땀과 눈물은 잠시도 마를 새가 없었다. 어찌나 연습이 혹독했는지 잠자면서도 노래로 잠꼬대를 할 지경이었다. 훈련이 거듭되자 노래의 어느 부분을 지정해도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와 춤이 연속동작으로 흘러나왔다.

 

박재준이 소녀들의 팔다리를 단련시킬 때 유영진은 그녀들의 복부를 복서들의 아랫배처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그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세 여고생의 배 위에 사람이 두 발로 서 있는 상태로 보컬 훈련을 실시했다. 이현세의 인기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나 구경했을 법한 지옥훈련이었다. 이는 목이 아닌 배로 노래를 부르게 하려는 극단적인 훈련방법이었다. 사관학교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특수훈련을 마치고 난 소녀들의 눈빛은 데뷔를 기다리는 설렘과 반드시 스타의 꿈을 이뤄내겠다는 투지로 반짝였다.

 

S.E.S.는 1997년 11월 28일에 방송된 SBS의 <충전! 100% 쇼>를 통해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그때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국가부도사태에 빠질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세 명의 소녀가 가수로 데뷔하고 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서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측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는 대가로 IMF의 구제금융을 구사일생으로 얻어낼 수가 있었다.

 

경제가 빙하기로 굴러 떨어지자 화사한 봄의 향기와 자태를 뽐내는 세 명의 귀여운 요정들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되레 더 뜨거워졌다. 무겁도 칙칙한 양복 차림의 정치인들과 경제관료들에 신물이 난 대중은 산뜻한 하얀색 정장을 입은 S.E.S.의 춤과 노래를 들으며 잠깐이나마 시림을 덜어낼 수가 있었다. 이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적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서 소녀시대를 필두로 한 걸그룹 열풍을 불러온 것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는 현상이었다.

 

I'm Your Girl은 기대 이상의 성공작이었다.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음반시장의 상황에서도 S.E.S.의 데뷔 앨범은 1주일 만에 16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소비자들의 심리를 고려하면 평상시의 30만장에 필적할 빅히트였다.

 

새로운 사회현상이 나타낼 때는 이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S.E.S.를 우상처럼 섬기는 남성팬 층이 형성되면서 누나 부대라는 호칭이 인구에 서서히 회자될 즈음이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S.E.S.가 MBC의 쇼 프로그램을 녹화하려고 가수 대기실에서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국집 철가방을 든 남자 한 명이 대기실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가방 안에는 중화요리 대신 세 명의 소녀에게 줄 갖가지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S.E.S.로부터 직접 사인을 받으려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변방하고는 방송국 안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정성이 정말로 대단했던 것은 배달원으로 위장한 문제의 남성팬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철가방 소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S.E.S.가 무대에 설 때마다 주로 남학생들과 군인들로 구성된 팬클럽 회원들이 '우리들의 천사, S.E.S.'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세 멤버들의 이름을 사자후를 연상시키는 우렁찬 목소리로 환호했다. 누나부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1998년 5월, S.E.S.의 공식 팬클럽인 '친구'의 창단식이 스타월드 주관으로 세종대학교에서 거행됐다. 1천 2백여명의 팬들이 모였는데 이들 가운데 90% 가량이 남학생들이었다. 회장단에도 8명 중 6명을 남자들이 채웠다. 이날의 행사는 걸그룹에 대한 남성들의 지지와 응원이 가요계의 인기 판도를 좌우하느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다. S.E.S. 멤버들은 이날의 창단식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너무 놀랐어요.", "상상이 안 가요.", "정말 감사합니다."

 

S.E.S.의 팬클럽 창단식은 이수만의 선견지명이 다시 한 번 적중했음을 증명하는 뜻 깊은 이벤트가 되었다. 

 

데뷔 수 주만에 I'm Your Girl은 정상 바로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런데 다음 주면 정상에 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예상치도 않았던 엉뚱한 노래가 1위를 차지하는 이상한 일이 몇 주 동안 반복되었더. 그러다 KBS는 어느 노래가 1등이 되었는지를 전혀 확인할 수 없게끔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아예 폐지해버렸다. 

 

그러자 SBS 서울방송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에 대해 이수만은 SBS가 여성 그룹을 견제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에 대응해 SM에서는 S.E.S.는 물론 H.O.T.의 방송출연도 전면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SM과 SBS의 갈등을 지켜보던 MBC는 이 틈을 노려 SM을 통 크게 지원하는 발 빠른 행보를 취했다. <로그인 H.O.T.>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에 내보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MBC는 특정 연예기획사에 몸담은 개별 가수인 H.O.T.의 인기를 공영방송 홍보에 이용했다는 비난을 사게 된다. 12월 초까지 지속된 SM과 SBS의 감정싸움은 물밑에서 화해를 모색한 끝에 조속히 진화되었다. 

 

H.O.T.와 S.E.S.와 신화가 동시에 인기가도를 달리게 된 1999년, SM에 소속된 아이돌 그룹은 방송사의 섭외 1순위로 떠올라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H.O.T.와 S.E.S.의 경우에는 많을 때는 한 주에 대여섯 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촬영장을 돌고 나면 멤버들과 스태프 모두가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언론사 연예담당 기자들에게 평시에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제로 보도로 옮기기에는 곤란하고 부적합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SM 내부의 매니지먼트를 둘러싼 문제였기 때문이다. 권력투쟁에 가까웠던 이 암투의 본질은 넘버 2를 놓고 벌이는 자리다툼이었다. 로드 곧 일신현장에서 뛰고 있는 매니저 그룹을 주로 관리하는 정해익과 내부에서 기획과 캐스팅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경욱 간의 알력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수만이 회사를 직접 관리할 적에는 실무자 간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됐던 까닭에 방송은 정해익이 총괄하고 캐스팅과 내부 관리는 김경욱이 책임지는 체재로 SM이 꾸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수만이 해외 음악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장기간 외국 출장에 나서면 두 사람 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수만에게 보고되는 내용과 실제 벌어지는 상황의 불일치는 조직을 근간에서부터 흔들었다. 

 

 


34. 해외시장에 도전하다

(생략) 이수만은 해외시장 개척의 마수걸이로 우리나라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시장을 노크하기로 진즉에 마음먹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과 다르면서도 같았다. 일본의 대중음악산업은 한국보다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몇 단계 앞선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 시장 또한 우리처럼 미국의 음악시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수만은 일본 시장에서의 사업파트너로 원래는 소니 뮤직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미국 CBS레코드사로 출발한 소니 뮤직은 1988년에 일본 전자업체 소니의 미국 내 자회사인 소니 아메리카에 인수된 이후로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라는 기업명을 사용해온 다국적 음반업체였다.

 

1998년 2월 이수만은 S.E.S. 멤버들을 대동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꿈꾸는 원대한 미래를 위한 시발점이 될 여행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이수만 일행은 휴식할 사이도 없이 소니뮤직으로 향했다.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린 가수들은 S.E.S.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한국가수들의 일본 진출은 비정규 콘서트 차원의 투어여행이 대부분이었다. S.E.S.의 일본행에서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방식으로 일본에서도 활약하겠다는 이수만의 굳은 의지가 깔려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한국가수들의 일본 시장 접근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되어 있었다.

 

이수만이 어떻게 생각하건 일본 시장은 한국 시장과는 매우 다른 곳이었다. 일본 프로듀서들의 반응은 언제나 무덤덤했다. 한국 가수들이 일본 프로듀서의 마음을 잡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한국에서 가수가 왔다고?"

 

그러나 이수만이 S.E.S.라는 한국산 요정들을 그들 앞에 소개했을 때 소니의 오디션 담당 프로듀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만족이라고는 모르는 혹독한 보컬 트레이너 유영진과, 힙합에 정통한 안무가 박재준이 공들여 다듬어낸 S.E.S.였다. 그들은 무반주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일어, 한국어의 세가지 언어를 병행해가며 절묘한 아카펠라 화음을 뽑아냈다. 이에 감동한 소니 뮤직 관계자는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형 스타가 현해탄을 건너왔다고 판단하고서는 부리나케 윗사람을 부르러 나갔다. 이수만은 S.E.S. 멤버들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만 남은 것처럼 만사형통의 모양새였다.

 

이윽고 아까의 담당자가 베테랑 프로듀서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한 번만 더 부탁합니다."

 

이수만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떨어졌다.

 

"피곤해서 오늘은 더는 못하겠습니다."

 

S.E.S.의 자존심을 지켜주겠다는 의도를 지닌 이수만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소니 뮤직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들짝 달려왔는데도 못하겠다니 일본인으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수만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비즈니스를 한 탓이었다.

 

그는 일본인의 사업관행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라도 당장 눈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만약 거부하게 될 때는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서 윗사람의 핑계를 대며 거절의 뜻을 표시한다. 담당자가 윗사람을 불러온 것은 S.E.S.가 오디션에 합격했음을 의미했다. 실무 담당자 선에서 불합격을 결정했다면 구캐여 상사까지 불러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날 S.E.S.는 별도의 추가 오디션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이수만의 결정은 오만에 가까웠다. 한국과 일본의 전혀 다른 문화가 만난 탓에 어색해지고 만 거이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소니는 S.E.S.와 계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다. 그 결과 SM과 소니 뮤직 간의 계약체결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S.E.S.는 소니 측과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계약기간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니는 이수만에게 7년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S.E.S. 멤버들과 SM의 계약기간은 5년이었다. 벌써 그마저 1년 반이 경과하고 있었다. 소니의 7년 계약을 수락할 수 없었떤 이수만은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최고의 기업을 상대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계약에 대한 상담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다른 업체에서도 이수만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일본 오키나와 출신의 걸그룹 SPEED의 프로듀서인 이치지 히로마사가 S.E.S.의 계약을 목적으로 극비리에 서울로 이수만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7천만 엔대의 몸값을 제시했다. S.E.S.와 데뷔 시기가 비슷한 다른 신인가수들의 몸값이 보통 3천만 엔대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 제안이었다. 한국 화폐로 계산하면 거의 8억원이 넘는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수만은 '스카이 플래닝'이라는 다른 업체와 40개월에 2천 5백만 엔을 조건으로 S.E.S. 일본 진출 매니지먼크 계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계약 자체만 놓고 보면 사슴을 사냥하려다 토끼를 잡은 격이었으나 이수만이 스카이플래닝과 계약을 체결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말 못할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다. 히로마사의 업체 규모가 스카이플래닝보다는 훨씬 작은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더 근본적 이유는 사람에 관한 사항이었다. 자신이 일본 시장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SM을 위해 현지에서 활동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수만은 이 계약 과정에서 그 적임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훗날 SM의 이사가 될 남소영이었다.

 

남소영은 경희대 일문과 3학년 때 일본을 방문해 한 일본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녀는 대학에서는 음악동아리에서 연주 파트를 맡았어따. 남소영은 음악을 좋아했던 까닭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계 음반회사인 삼포니레코드에 입사해 7년간을 일한다. 이때 그녀는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며 일본 음반 업계와 인연을 맺는다. 

 

더 넓은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어진 남소영은 일본행을 단행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스카이플래닝에 입사하여 한국에서 온 강수지, 대문 출신의 비비안 수 등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 이수만이 스카이플래닝과 계약을 맺을 적에 남소영은 스카이플래닝의 담당자로 나왔었다. 일본통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던 남소영의 매끄로운 일처리 능력이 마음에 들었던 이수만은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액수로만 따지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S.E.S.의 일본 활동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이수만의 기대대로 남소영은 매우 헌신적인 자세로 S.E.S.의 일본 활동과 관련된 매니지먼트 일들을 무난하게 처리해나갔다. 이수만이 VAP 레코드와 S.E.S.의 일본 내 음반취입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도 남소영의 도움이 컸었다. 음반제작 계약을 맺는 걸로 SM의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한 기본적 뼈대는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남소영은 아직은 이수만의 사람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는 스카이플래닝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S.E.S.는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바랐던 만큼의 성과물을 거두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S.E.S.의 일본 내 마케팅 포지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S.E.S.는 세련된 음악과 신비로운 요정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수만의 희망과는 다르게 현지의 여느 걸그룹들과 비슷한 위치로 내려갔다. 스카이플래닝이 일본 시장에 S.E.S.를 맞추기 위해 그저 그런 수준의 걸그룹으로 S.E.S.의 개성과 특징을 평균화한 탓이었다. S.E.S. 특유의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기계적 획일성으로 대변되는 일본풍으로 인위적으로 개조된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이수만은 SM의 다른 팀들을 차후에 일본으로 진출시킬 때는 S.E.S.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수만은 일본에서 S.E.S.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해외업무를 전담해줄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S.E.S.가 일본 열도에 발을 내디딘 이후 이수만은 H.O.T.가 회사에 벌어다준 수익금까지 쏟아부어가며 본격적인 해외 시장 공략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해외사업 담당자 모집 공고를 냈다. 이 모집공고에 초중고는 일본에서 다니고, 대학은 한국에서 나온 서른 살의 젊은이 한 명도 응모했다. 훗날 SM 엔터테인먼트의 CEO가 되는 김영민이었다. 

 

김영민은 아버지를 따라 만 세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16년을 살았다.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고려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원어민 뺨치는 빼어난 일본어 실력을 활용하여 동시통역사가 되었다. 통역사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틈틈이 찾고 있었던 그는 때마침 SM에서 해외사업 담당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서는 쏜살같이 이수만을 찾아왔던 것이다.

 

김영민은 시원하게 생긴 넓은 이미가 인상적으로 보이는 깔끔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지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만이 좋은 사나이는 아니었다. 차분하고 겸손한 행동거지에 조리 있는 언변도 지니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 대단히 해박했음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이수만은 김영민이야말로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해외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할 재목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이 30세의 남성 동시통역사를 SM의 사운이 걸린 해외사업 담당자로 즉시 선발해 지체 없이 현장에 투입시켰다.

 

김영민이 일본통으로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원격으로 일본 시장을 관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빈번히 출장을 가야만 했다. 방대한 일본 시장을 다루는 업무를 그 혼자서 소화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수만은 남소영의 능력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있음을 인식했다. S.E.S.가 일본에 진출한 1998년부터 남소영은 세 소녀가 출장하는 일본무대의 업무협조 담당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2000년에 이르러 이수만은 남소영을 SM에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2001년 1월 2일 도하 신문들에는 SM이 일본의 요시모토흥업,에이벡스와 합작으로 SM JAPAN을 설립했다는 기사가 일제히 게재되었다. 이 합작법인에 한극 측 실무자로 참여한 남소영은 일본 측 관계자들과 협력해 필요한 업무들을 착착 진행시켜나갔다. 그녀의 합류를 계기로 이수만은 일본 시장에서 더욱 안정되고 체계적인 마케팅 통로를 확보하고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36. 초등학생 권보아
S.E.S.를 일본에 처음 진출 시킬 때 이수만은 일본의 비즈니스 생태계 구조가 무척 궁금했다. 비행기로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 나라임에도 그동안 접근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연예계는 한국의 대중문화판과는 풍토가 많이 다른 점이 이수만의 구미를 자극했다. 일본은 1998년 연말을 기준으로 1억 2천 6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 많은 인구와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문화상품에 대한 수요 역시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은 음악산업이 체계적으로 잘 발달되어 있었는데 특히 악기산업은 기술력과 전문성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수만은 SM 창사 초기부터 일본의 악기업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 음악시장의 흐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는 S.E.S.가 새롭게 열어놓은 통로를 이용해서 일본 시장이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더욱더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었다. 이수만은 일본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가수가 SM에 있다면 일본처럼 좋은 기회의 땅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S.E.S.의 경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슈가 예상대로 일본 시장의 풍토에 잘 적응하였다. 바다와 유진은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재미를 붙여갔지만 언어 소통에서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숨 가쁘게 방송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탓에 일본어를 완벽히 배워놓을 여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와 유진의 일본어는 기초적 의사소통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미리 준비된 원고에 따라서 일본방송에 출연하는 일은 그럭저럭 가능했지만 다양하고 미묘하나 감정선까지 일본어로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데는 현해탄만큼이나 넓은 간극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이수만은 교두보를 마련하여 뛰어든 선구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난관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 명의 소녀들의 후속으로 일본에 진출하게 될 가수들에게는 S.E.S.가 현지 활동에서 맞닥뜨린 처치 곤란한 애로사항들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면 일본 시장에 진출할 가수는 나이가 굉장히 어릴 필요가 있었다. 

 

1990년대 중후반, 일본 최고의 가수로 전성기를 구가한 아무로 나미에야말로 이수만이 일본 시장에서 길러내고 싶은 이상적인 귀감이었다. 그녀는 열다섯 살 무렵에 4인조 걸그룹 슈퍼몽키즈로 데뷔했다. 그룹의 일원으로서는 비록 성공적인 발걸음이 아니었으나 몇 년 후 솔로로 전향한 아무로 나미에는 음악시장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수만은 그녀의 성장 궤적을 따르는 스타를 발굴해 육성하기로 결심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려면 최소한 3년 정도는 집중적으로 일본어를 학습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나니 일본 시장을 공략할 가수를 키우려면 초등학교 5~6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에 캐스팅을 해야만 했다. (중략)

 

백화점 댄스 경연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던 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아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SM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디렉터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목격한 그는 즉석에서 보아에게 오디션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열두 살 때였다. 가수가 될 꿈에 부푼 보아는 며칠에 걸쳐 열심히 오디션을 준비했다. 그녀가 부를 노래는 S.E.S.의 '완전한 이유'였다. (생략)

 

 

 

41. ID; Peace B
(생략) S.E.S는 한국에서는 정상급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수많은 걸그룹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S.E.S.의 일본 내활동을 위한 계약에는 치밀한 검토가 부족했던 탓에 S.E.S.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SM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이수만이 S.E.S.를 일본에 진출시켜서 누리는 혜택이라고는 현지의 시장상황에 대한 정보를 한국 내 경쟁업체들보다 먼저 취득할 수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S.E.S.는 일본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NHK, NTV, 후지TV 등 일본 주요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도 빈번하게 출연하게 되었다. 일본인 사회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일본에서 성장한 슈는 유창한 일본어로 맞장구를 칠 수 있었지만 기본적 의사소통만 가능한 바다와 유진은 표정연기만 하는 수준으로 앉아있어야 했다. 바다와 유진이 현장분위기에 맞춰서 한국어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이 말을 슈가 중간에서 일본어로 통역해주는 식이었다.

 

이수만은 한국에서 펄펄 날아다니던 바다와 유진이 일본에서는 병풍과 비슷한 존재가 돼버린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이들 두 사람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일본어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커다란 아쉬움을 느꼈다. 한국, 일본, 대만을 활동반경으로 삼아 바쁘게 무대에 오르느라 일본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실력까지 갖추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이수만은 바다와 유진의 완벽하지 못한 일본어 구사 능력이 S.E.S.와 일본 대중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형성시켰음을 깨달았다. S.E.S.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내내 부딪치게 된 언어상의 한계를 직접 목도한 이수만은 SM이 일본에 내놓을 다음 가수에게는 데뷔하기 전에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갖춰놓도록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생략)

 

 

 

 

43 보아, 일본 열도를 삼키다
(생략) 이수만은 S.E.S.의 일본 시장 진출 이후 수시로 일본 열도를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일본 연예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기회가 닿는 대로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런 인사들 가운데는 에이벡스 그룹의 요다 다츠미 회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이수만은 보아를 일본 열도에 상륙시키기 직전인 2001년 1월 2일, 일본 진출의 전진기지가 될 SM 재팬을 설립했다. SM 재팬은 SM 엔터테인먼트가 일본의 음반사 에이벡스,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 요시모토흥업 등과 합작해 만든 회사로 총출자급 5천만 엔 중 2,750만 엔을 SM 측이 부담했다. 이로써 SM 재팬은 이수만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SM의 계열사가 되었다.

 

이수만이 일본의 연예계 관계자들과 힘을 합쳐 이 법인을 만든 이유는 일본에 진출하는 자사 연예인들의 매니지먼트를 직접 담당하는 것에 더하여 일본 현지에서의 음반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치려는 데 있었다. 그는 S.E.S.가 일본에 진출했을 당시 일본 내 매니지먼트를 스카이플래닝에 일임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스카이플래닝은 한국에서 남자 청소년들과 군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S.E.S.를 일본의 평범한 걸그룹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S.E.S. 멤버들의 매력과 음악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데 실패한 탓이었다. 자신만의 특성을 발휘하지 못한 S.E.S.는 결국 일본의 수많은 걸그룹에 파묻혀 애초에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수만은 S.E.S.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SM 재팬의 설립을 통해 SM의 사업방식은 기존에 한국 가수들이 일본 시장에 접근하던 방식과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수만이 일본에 진출하는 SM 가수들을 직접 관리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중략)

 

2001년 5월 30일 보아의 일본 데뷔 싱글 앨범 ID; Peace B가 에이벡스에서 발매되었다. 보아의 일본 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음에도 벨파레의 쇼케이스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일본 연예계의 흥분과 관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뷔 싱글 ID; Peace B는 오리콘 차트 싱글 20위에 올랐다. 1998년 S.E.S.가 부른 우연히 만난 세계가 37위를 기록한 것을 두고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일본을 점령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점을 감안하면 두드러진 약진이었다. 그러나 S.E.S.보다 훨씬 치밀하게 준비하고 맹훈련을 거듭하며 두드렸던 일본 시장이었던 만큼 이수만과 보아 모두에게는 양에 차지 않는 성적이었다. (생략)

 

 

 

33. 팬덤 문화의 빛과 그림자 
H.O.T.에 대한 안티성 팬클럽이 게릴라처럼 여기저기로 확산되어갈 즈음 S.E.S.에 대한 안티 팬들의 공격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PC 통신을 이용하는 다수의 남성들이 S.E.S.의 팬으로 결집하자 몇몇 소녀들이 안티 팬으로 변신해 S.E.S.에 관한 근거 없는 낭설을 퍼트렸던 것이다. "노래실력이 없다', "가요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누가 성형수술을 했다더라", "누군가의 가방에서 담배가 발견됐다더라", "아무개가 다른 남성 연예인과 사귄다더라" 등이 대표적 음해들이었다. 

 

 

 

45. 신인가수 잔혹사
2001년 말부터 이어지는 실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SM은 시장 개척을 위한 도전장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은 반제품을 완제품으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번 그룹은 S.E.S.와의 자연스러운 바통 터치를 위해 준비한 것같이 보였다. 신비라는 다소 고전적 이름을 내걸고 등장한 이 여성 트리오의 멤버는 유수진, 오상은, 유나였다. 신비는 2002년 4월 1일 1집 음반 15 to 30을 내놓았다. 이전의 두 그룹의 데뷔 앨범과 똑같이 SM 음악의 관제사인 유영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비 1집의 총괄 프로듀서 역할을 S.E.S.와 보아 등의 음반 작업을 꾸준히 맡아온 작곡가 강원석이 담당하였다. 알앤비 발라드 계열로 S.E.S.의 노래들과 아주 흡사한 분위기를 풍겼던 신비의 음반은 발매 이후 별다른 상업적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S.E.S.의 후계자로 부상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신비의 음악은 SM의 과거 음반을 찾아 즐기는 많은 대중들의 뒤늦은 사랑을 받게 된다. 듣기 편하면서도 감미로운 스타일이 젊은 감성과 잘 맞아떨어진 덕택이었다. 

 

 

 

46. NO.1의 대활약
보아가 SM의 든든한 살림꾼 노릇을 맡고 있을 때 5년 동안 한국 최고의 여성 트리오로 군림했던 S.E.S.는 SM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바다와 유진은 SM과의 계약 갱신을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이수만의 품을 떠났다. 그후 유진은 싸이더스의 음반사업부문장에서 물러난 정해익이 설립한 F&J 엔터테인먼트에 둥지를 틀었고, 바다는 웅진코웨이 산하 웅진미디어로 이적했다. 멤버 가운데 오직 슈만이 SM과 계약기간을 연장했다. 그러나 솔로로 전향한 슈는 활동범위가 점점 줄어들어서 가수로서의 존재감이 미미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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