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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운명론자, 바다는 깊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니체가 ‘운명애’를 말할 때와 비슷한 감정이리라. 험난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경지.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유난히 강한 자의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형성해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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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가수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배우라고 생각하나요” 정체성을 물었더니 “예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수와 배우의 구별이 없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구분을 없애고 종합 예술인으로 살고 싶어요. 예술 안에도 여러 장르가 있겠지만, 감정을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남고 싶어요. 그 방법은 노래가 될 수도, 무용이 될 수도, 연기가 될 수도 있겠죠. 그냥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하긴, 예술의 본질 앞에서 장르의 구별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자리한 그녀와 마주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예비 수녀 수련 받으며 보낸 청소년기

Q :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요
어릴 때 아버지가 아프시면서 시골로 전학을 갔어요. 원래 부산에서 큰 나이트클럽을 하셔서 돈도 많이 버셨는데, 갑자기 병을 얻으셔서 정원이 있는 집에 살다 쥐가 나오는 다락방 같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신이 저를 그리로 부르셨나 봐요. 

 

Q : 그곳이 어디였죠
인천 소래포구요. 자전거 타고 가면 바닷가가 나오고 과수원과 포도 농장이 있고.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들과 자연 속에서 뛰어놀았어요. 어려운 환경을 잊게 해준 게 자연이었어요. 매일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며 자연 속에서 위로받고 보호받으며 자랐어요. 어릴 때부터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 에너지를 받아 어려운 환경에서도 밝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죠.

 

Q : 무슨 노래를 그렇게 불렀나요
창, 가스펠, 가요. 아는 장르는 전부 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 한국 가수 중에는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부르며 열심히 비브라토 연습을 했어요. 아버지가 한두 곡 가르쳐 주시던 창도 불러보고. 아버지가 원래 창을 하셨고, 생업으로 트로트도 하셨어요. 젊은 시절엔 탈극, 악극, 막간극 같은 것도 하셨다던데, 그때 사진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당신이 돌아가실 줄 알고 제가 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뭔가 남겨주고 싶으셨대요. 창을 배울 때는 아빠가 두 발로 제 배를 밟고 올라서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견디는 것만 했고, 중학교 때는 그 상태에서 소리 내는 걸 연습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 상태로 창을 할 수 있었어요. 

 

Q : 아버지가 가수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셨겠네요 
아뇨. 막상 안양예고에 간다고 하니 반대하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수녀가 되기를 바라셨거든요. 실제로 중1 때부터 고1 때까지 3년 동안 예비 수녀 수련을 받았어요. 여름 방학마다 꽃동네, 천사의 집, 평화의 집을 찾아다니며 아기들 돌보고, 환자들 임종 지켜보고, 할머니 할아버지 똥오줌도 다 받아냈어요. 그래서 안양예고에 합격했을 때 동네에 플래카드가 걸리고 이장님은 돼지까지 잡아주셨는데, 유독 아빠만 반대하셨어요. 예고 등록금이 그렇게 비싼지는 몰랐어요. 사정이 안 되니 아버지는 일반 상고 진학을 원하셨죠. 언니도 공부를 잘했지만 상고를 갔는데, 저는 다르게 살고 싶었어요. 아버지를 설득했죠. 아버지 시대에는 가수가 미군부대나 나이트클럽에서만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이제 다른 세상이 올 거라고. 

 

Q : 안양예고에서 전공은 무엇이었나요
연극영화과요. 처음에는 배우가 되려고 들어갔죠. 아버지가 그 학교에서 1등 해야 연예인이 된다고 하셨어요. 공부는 1등을 못했지만 실기는 항상 1등이었어요. 몸으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것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실 저는 배우로 데뷔할 줄 알았어요.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에서 학교를 통해 리드 보컬 제의를 했을 때, 대학 학비를 지원해 준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예요. 대학은 꼭 가야만 했기에. 

 

Q : 연기 수업은 어땠나요
한 학기에 한 번씩 작품을 올렸어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부터 한국 고전은 물론이고, ‘산불’ 같은 근대의 작품까지요. 연출도 하고, 여주인공도 하고. 아주 즐거웠어요. 그 시절에는 외골수였어요. H.O.T.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인데도 아이돌이 뭔지 몰랐고, 서태지한테도 관심이 없었어요. 유일한 취미는 서울 대학로에서 하드코어한 연극 보기. 아이돌 가수를 쫓아다니는 친구들이 이해가 안 갔어요. 클래식만이 진정한 예술이라 생각해서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는 게 창피하기도 했어요. ‘이건 진정한 예술이 아니야. 말도 안 돼.’ 돌이켜보면 애가 어른인 척했던 거죠. 그래도 자기합리화를 해야 하니까 ‘가수는 어떤 이야기든 풀어내는 해설자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Q : SM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예고 다닐 때는 연기와 노래 모두 열심히 했기에 학교에서 나름대로 유명했어요. SM에서 리드 보컬을 찾고 있다가 예고 쪽으로 알아보셨나 봐요. 예고 중 안양예고 친구들이 끼가 많더라는 얘길 듣고, 노래 잘하는 친구를 보내달라고 했대요. 연습생은 모두 8명이었어요. 병아리 감별하듯 그중에서 오래 살 놈만 고른 거죠. 시골에 살 때 꿩 사육을 하는 뒷집 할아버지께 인생을 배웠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멀쩡히 잘 돌아다니는 병아리들을 초코파이 상자에 던지듯 솎아내세요. 여쭤 보니 1시간 안에 죽을 애들을 골라낸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불쌍해서 제가 데려가 키우겠다고 우겨서 데려왔는데, 진짜 1시간 만에 죽는 거예요. 그게 인생사처럼 느껴졌어요. 그때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Q : 멤버 중에 일본인이 있는 걸 보니 S.E.S.는 아시아 전역을 겨냥한 프로젝트였나 봐요 
예. 저흰 원래 국제 프로젝트 그룹이었어요. 중국어 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3인조로 만드느라 빠졌죠. 저희도 데뷔를 한국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경험 삼아 음반을 내보자고 한 건데, 그게 100만장이나 팔릴 줄은 아무도 몰랐죠. H.O.T. 팬들이 우리 오빠들 회사에서 나온 그룹이니까 사주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학생들이 CD를 사더라고요. 여자 팬도 있고 남자 팬도 있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저희가 H.O.T. 보다 팬 구성이 다양한 편이었어요. 실제로 SM 이수만 대표님이 남녀가 모두 좋아하는 음악과 콘셉트를 만들어주셨고요.

 

Q :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추억이 있다면
이수만 대표님이 저를 아이돌 1세대의 1호 리드 보컬로 키우셨잖아요. 그때 저는 책임감이 거의 ‘북파 공작원’ 수준이었어요. 집안에서는 막내딸이었지만 사회생활은 리더로 시작한 거예요. 책임감으로 무장한 여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대표님이 녹음하기 전에 영감을 받으라고 우리나라에 없는 음반을 직접 사다 주곤 하셨어요. 부담스럽고 힘들었죠. 이걸 해내거나, 그 이상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해내고 나면 큰 성취감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감싸 안으며’ 같은 일본 번안곡을 원곡 가수보다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열심히 연구했지요.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어요.

 

Q : 당시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기도 했고요 
예. 당시 일본에 한류는 없었지만 세계를 겨냥했기에 갔죠. 척박한 상황이었어요. 나름 일본에서 한국의 ‘인기가요’ 같은 프로에도 나가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은 없었어요. 어린 여자애들 셋이서 나란히 입국 심사대에 서 있으면 왜 왔는지 의심부터 해요. 공연하러 왔다, 방송하러 왔다 해도 안 믿더라고요. 설명하느라 만날 늦게 나오곤 했어요.

 

Q : 그런데 왜 해체됐죠 S.E.S. 해체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당시 이수만 대표님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해외에 나가셔야 했고, 저희는 재계약을 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저희는 늘 대표님을 믿고 일을 해오던 터라, 그분과 직접 대화하고 싶은데 중간에서 일해주시는 분들을 거치며 오해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유진이는 정말 똑똑하고 당차서 학교 다닐 때 내신이 항상 올 A였어요. 실력으로도 충분히 고대를 들어갈 수 있었죠. 그런데 특혜를 받았다고 마녀사냥을 당했어요. 당시 SNS가 있었다면 리더로서 항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유진이가 진실이 아닌 일로 매도당해도, 회사의 수장이 없으니 방어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유진으로 인해 해체되었다고 기사가 나갔어요. 한두 명 기자에게 아니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었어요. 회사에 대한 불만은 아니고, 소통의 부재로 인한 운명의 장난이었죠. 대표님이 계셨다면 저희는 해체되지 않았을 거예요.

 

Q : 돌이켜보건대 S.E.S. 해체를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보나요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세상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잖아요. 당시 대표님이 저희에게 이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얘기하셨어요. 세상이 바뀌면 CD도 없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우리나라 음악이 전 세계에 유행할 것이라고도 했죠. 막연히 믿었어요. 재계약하면 즐겁겠다는 믿음도 있었고. 하지만 저희 셋은 해체하기로 결정했어요. 당시 재계약을 하면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표님이 제게 재계약하고 멤버들을 설득해서 미국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바다가 고추냉이는 잘 못 먹어도 버터는 좋아하잖아” 하면서(웃음). 저는 아시아의 브리트니가 될 거라 생각해서 신이 났어요. 하지만 유진이가 “그 말씀이 맞고 우린 그렇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더군요. 세계 어디를 가도 나를 알아보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거죠. 물론 제가 계속 우겼다면 냉철하나 착한 친구니까 동의해줬을 수도 있지만, 차마 같이 가자고 할 수 없었어요. 유진의 선택을 존중하느라 흩어지게 되었죠. 하나님께서 또 다른 관계를 마련해주려고 이런 시련을 주셨나 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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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 통해 서사에 빠지다

Q : 첫 무대에 선 것은 뮤지컬을 통해서였죠 
예. ‘페퍼민트’라는 창작극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지만, 다소 건방지게 ‘나는 본질을 쫓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첫 작품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널리 알려진 작품보다 창작극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청 고생했어요. 지금이라면 다시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하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이 드네요. 

 

Q : 초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실험적인 작품을 주로 했던 모양이에요
예.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이지만 제 인생에 미학을 보태고 싶었어요. ‘텔 미 온 어 선데이’.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연기가 정말 돋보여야만 하는, 배우로서 근간을 가지고 가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뭔가 여배우로서 보여주고 증명해낼 수 있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노래는 못했어요.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노래가 안 나오더라고요. 처음에 옷 한 벌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막이 내리기까지 2시간 30분 동안 내려가고 갈아입고 그런 게 없어요. 모노 뮤지컬이죠. 다른 등장인물도 제가 연기를 해서 관객들에게 상상하게 해주는 거죠. 이 작품을 마치고 나니까 두려운 작품이 없어졌어요. 

 

Q : 노래가 잘 안 됐다고 했는데, 뮤지컬에서 부르는 노래와 아이돌 그룹을 할 때 불렀던 노래가 어떻게 다른가요
사실 연기가 해결이 안 될 때 노래도 어려운 것 같아요. S.E.S. 활동을 할 때 항상 찬 물로 샤워를 했었어요. 데뷔 1년 만에 부모남께 집을 마련해드릴 수 있었지만, 그 전까지는 엄마 아빠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도 같이 고통을 나누느라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했던 거죠. 그 정도로 의지와 신념을 다지며 가수로 도전했던 거예요. 그런데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전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스스로 이렇게 합리화시켰죠. ‘너는 가수라는 삶을 연기하는 배우야. 아이돌 여자의 삶을 연기하는 거야. 네 인생에는 카메라가 다 달려 있어.’ 나중에 보니 일기장에도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Q : 아이돌 스타가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게 대중의 눈에는 급작스러운 변신으로 보였을 겁니다
대중들은 ‘텔미 온 어 선데이’라는 작품명도 생소하고 ‘바다가 언제 그런 작품을 했지’ 싶을 거예요. 그게 ‘노트르담 드 파리’도 아니고, ‘미녀는 괴로워’도 아닌 워낙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심지어 공연 중에도 모르셨을 겁니다(웃음). 

 

Q : 어떤 작품이었나요
대본을 받고 숨이 턱 막혔어요. “저 아이돌 출신 가수인 거 잊으셨어요” 농담으로 그런 말도 했었어요. 젊은 나이에 모노 뮤지컬에 도전하는 배우는 많지 않아요. 그런데 그 작품은 마침 곧 나에게 다가올 일, 즉 30대 골드 미스 역이었어요. 여섯 명의 남자에게 차이면서 겪는 성장통. 젊은 시절의 상처가 나이 들었을 때 받는 것보다 더 강렬하잖아요. 사랑의 감각이 살아 있을 때는 누가 나를 세게 긁고 가는 느낌이니까, 원래 내가 꿈꾸던 나는 배우였기에 꿈속에서 타고 싶던 백마를 한번 타 본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 작품은 성소처럼 제 안에 남아 있죠. 

 

Q : 서사극을 좋아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를 좋아하나요
예. ‘코카서스의 백묵원’. 마지막 졸업 작품을 그걸로 했어요.

 

Q : 어떤 점에 끌렸나요
사실 처음에는 서사극의 개념도 정확히 몰랐고, 너무 많은 인물이 나와 누가 누군지도 헷갈렸어요. 그런데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까지도 정확한 포지션을 가지고 연기를 하더라고요. 이런 작품이 왜 만들어졌는지 생각했죠. 수많은 인물을 쏟아내는 서사극을 보며, ‘아, 이건 세상을 즐겁게 표현하며 많은 인물을 대변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Q : 이제까지 소화한 배역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누구였나요 
고등학생 때 ‘30일간의 야유회’라는 작품에서 남자 역할을 맡았어요. 오박사라는 캐릭터로 박학다식한 인물이에요. 모두가 30일 동안 지구의 종말처럼 인생의 끝에 다다른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었죠. 주연은 아니었어요. 주연만 하다 처음으로 조연을 맡는 바람에 ‘내 연기가 예전보다 못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오박사는 시니컬한 인물로, 오만하고 비열하고 비참한 캐릭터지요. 여자도 잘 모르면서 남자의 두려움을 연기해야 했는데, 그때는 상상력이 정말 풍부했어요. ‘아마 이랬을 거야’ 싶었던 부분들이 연기로 쭉쭉 나왔죠. 그 역할을 하면서 선생님이 왜 제게 그 역할을 맡겼는지 알겠더라고요. 학생 연극이라 관객이라야 근처 남학교 학생 아니면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다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하며 연기하는 저에게 막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었지요. 미운 역할이지만, 나중에는 제일 사랑하는 캐릭터가 되었죠.

 

Q :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그 작품의 여주인공을 꼭 해보고 싶어요. 한국에는 뮤지컬이 아직 안 들어왔고 연극만 올라갔어요. 이 작품은 고1 때 처음 접했는데 제목이 야하더라고요. 서점에서 야한 건 줄 알고 샀어요. 처음 읽을 땐 몰랐는데 계속 읽다 보니 느낌이 왔어요. 지금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 작품은 늘 제 마음의 서재에 있죠. 안 되면 나중에 혼자서라도 꼭 할 거예요.

 

Q : 아직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죠
앞으로 영화에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드라마보다는 잘 맞지 않나 싶어서. 영화는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어요. 매력을 느꼈던 작품들의 테두리 내에서는 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다 잘해내는 것 같거든요. 

 

Q : 뮤지컬 배우로서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 중의 하나가 역시 ‘노트르담 드 파리’일 텐데 그 작품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저는 운명론자인데, 정말 운명적인 작품이에요. 어릴 때 형편이 어려워 집 얻을 상황이 아니었을 때, 마을 성당에 조립식 건물로 된 사무실이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그 공소를 저희 가족에게 내어주셨어요. 아버지가 아프시니까 나을 때까지 공소 앞 정원을 관리하며 지내라고. 저희가 새벽 미사 오시는 분들 문 따드리고 마리아 상 목욕시키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성당 청소는 제가 했죠. 성전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그러니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는 꼭 제 얘기 같아요. 성당 앞마당에서 제가 노래를 엄청 했거든요. 앞마당 잔디에 물 주고 다 치운 다음에 맨발로 춤추고 그랬으니까. 수록곡 중 ‘이방인의 마리아’라는 노래를 듣고 나서 꼭 하고 싶었어요. 가사가 참 좋더라고요. 유신론자, 무신론자를 떠나 인간이라면 감동할 수밖에 없는 가사라서 인간적 상처가 느껴져요. 성당에서 춤추는 여자 이거 나잖아! 이렇게 된 거죠. 그 작품으로 신인 여우주연상도 받았고요. 

 

Q :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뭔가요
너무 많아요. 먼저 ‘미녀는 괴로워’. 영화로도 보셨겠지만, 30kg 완전 군장 무게의 분장을 하고 한 시간을 뛰어다녀야 했어요. ‘페퍼민트’도 특별하죠. 뮤지컬을 처음 시작하는 가난한 마음과 같은 작품이에요. 거기 나오는 인물 이름이 ‘바다’예요. 작가님과의 만남도 운명적이었고요. S.E.S. 때 방송을 끝내고 숙소에 누우면, 자꾸 내 안에서 뭔가 부딪히는 거예요. 배우를 안 하고 아이돌로 사는 게 맞나 정체성의 혼란이 와서, 밤만 되면 밖에 진을 치고 있는 팬들을 피해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엄청 뛰었어요. 어느 날 그렇게 뛰는데 비가 내리는 거예요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 꼭대기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어요. 다들 절 쳐다보더군요, 너무 목이 말라 바에 가서 물을 한 잔 얻어 마셨어요. 그런데 저기서 어떤 여자 분이 다가와요. 첫인상이 마치 마리아 칼라스 같았어요. 오시더니 저를 힐끗 보고 “인디언인 줄 알았네” 그러는 거예요. “뭐하는 사람이에요”라면서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다고 했어요. 그분은 제가 가수라는 것을 못 알아보셨어요. 대신 물을 건네주던 바텐더가 저를 알아봤고, 덕분에 그분께 그날 밤 제 인생을 다 얘기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너는 그럼 배우를 해야겠구나” 하시며, 쓰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 같이 만들어보자고 하셨어요. 그분이 뮤지컬 작가였던 거죠. 그렇게 만들게 된 작품이 ‘페퍼민트’예요. 

 

Q : 당연히 작품에 자전적 요소가 들어 있겠네요
예. 주인공이 제 이름을 가진 것도 제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에요. 강원도에 가서 같이 글 쓰고 그랬어요. 작품의 콘셉트는 한국판 ‘오페라의 유령’이에요. 귀신과 가수가 된 여자가 만나는데, 그 배경이 아버지가 아파서 처음 갔던 파란 지붕 집이에요. 제작자와 사랑에 빠지는 몇 개는 연극적 요소고, 그 외에 캐릭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든가 아리아를 부를 때의 심리 등은 저 그 자체예요. 바람이 불어올 때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며 느꼈던 느낌, 그런 감정을 들려드리면 가사로 쓰셨죠.

 

Q : 함께 공연을 하며 호흡이 잘 맞는다고 느낀 동료가 있는지
김선영 선배요. 그분은 착한 반장 느낌이에요. 후배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세요. ‘텔미 온 어 선데이’랑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작품을 같이했어요. 저에겐 없는 걸 갖고 있으세요. 차분하게 연기하는. 저는 완전히 몰입하는 형이거든요. 

 

Q : 지금은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준비하고 있죠
예. 1월 9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합니다. 뮤지컬로서는 한국 초연인 셈인데, 미국의 소설을 프랑스에서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번 작품은 프랑스 원작을 가져온 거예요.

 

Q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 팬이 많습니다. 그 감동이 온전히 전해질까요
100%는 아니겠지요. 60% 정도는 영화의 느낌을 살려서 하지만 40% 정도는 소설에 의지하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느라 힘들었어요(웃음). 세 권이나 되는지 몰랐거든요. 

 

Q : 책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자기 배역 위주로 읽겠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좀 어려웠어요. 앙상블이 중요해서 그 장면이 왜 필요한지 책을 꼭 읽어야 했거든요. 감독님의 주문으로 평소보다 더 자세히 읽어야 했죠.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뿌듯했어요. 원래는 얇은 책을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시집을 많이 읽었고요. 최근에는『피로사회』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참, 선생님 책도 이번에 사서 읽었어요. 말씀을 재밌고 통쾌하게 하셔서 궁금했거든요. 어려운 단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검색도 해가며 읽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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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면서 뮤지컬을 하는 뮤즈, 나는 ‘가뮤즈’ 

Q : 바다를 단지 ‘아이돌 출신의 뮤지컬 배우’라고 단편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섭섭할 때는 없나요
아뇨. 저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저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볼 수가 없잖아요. 방송에서 편집해서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요.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거부할 수도 없죠. 바른말 하고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쯤은 큰 문제가 아니야 하면서 다독이죠. 속상할 때도 있지만, 마음의 지우개로 싹 지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나이가 들면 아이돌의 모습이 아니라 제 본래의 모습, 즉 데뷔하기 전의 모습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노트르담 드 파리’를 하면서 ‘숙명’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게 되었어요. 그 단어를 접할 때만 해도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작품을 하고 나니 ‘숙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고귀하게 느껴져요. 저는 그 숙명 때문에 더 진취적일 수 있는 ‘셀프 디바’예요.

 

Q : ‘셀프 디바’라뇨
예. 전 그 말이 좋아요. 자족적 디바라고 할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만든 말이에요. 요즘은 ‘디바’라는 말을 너무 헤프게 쓰곤 하는데, 저는 진정한 디바라면 자기 안에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불러주거나 어디서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지속성을 갖춰야 해요. 그 밖에도 혼자 만든 말이 또 있어요. ‘가뮤즈’. 가수인데 뮤지컬을 하는 뮤즈들을 저 혼자 그렇게 불러요. ‘가디언’이라는 수호천사의 의미까지 담아서요. 그렇게 제 인생에서 의미를 갖는 혼자만의 단어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Q : 평소 연기나 노래 연습은 어떤 식으로 하나요
새로운 걸 던져주는 곳에 많이 가요. 최근에 오케스트라 협연이 있었는데, 요즘 저를 불러주시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기존에 했던 곡이 아니라 어떤 곡을 해야 할지 지휘자 분들께 조언을 구해요. 새로운 곡을 부르고 혼자 습득하는 게 힘들지만 성취감이 있어요. 이수만 선생님께서 유로팝을 던져주실 때 느꼈던 어려움을 이제는 제가 스스로 찾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Q : 연출에도 욕심이 있는지
욕심은 있는데, 그런 운명이 주어진다면 모를까 억지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Q :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궁금해요
퀼트를 해요. 대단한 건 아니고, 보석함이 됐건 기타 조각 쿠션이 됐건 저에겐 비우는 작업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모닥불 피우기를 좋아해요. 가끔 모닥불을 피우러 강원도의 친한 친구들한테 가요. 모닥불이 있는 자연 속에서 꿈을 키우던 시절의 향수를 느껴요. 그림도 가끔 그리고요. 노래나 대사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지지만, 페인팅은 빨강을 그으면 눈에 확 보이잖아요. 표현이 되어 남는 것이 있어서 좋아하나 봐요. 

 

Q : 어떤 그림을 그리나요
추상화는 별로 안 좋아해요. 과거 제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의 저를 그리기도 해요. 여러 재료를 막 써요. 목탄을 쓰기도 하고 유화로 그리기도 하고. 배운 적 없이 내키는 대로 그려요. 유화는 잠깐 배웠었어요. 붓 쓰는 법, 물감 섞는 법 정도만 배웠고 나머지는 멋대로 해요. 스케치만 할 때도 있고. 그냥 그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요.

 

Q : 그건 그렇고, 열애설 기사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일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연애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결혼 적령기에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이 제 운명의 상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요.

 

Q :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게 연애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버지가 제가 수녀가 되기를 바라실 때 저는 현모양처를 꿈꾸었으니까요. 무대 위에서 파격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개인적으로는 평화로운 삶을 원해요.

 

Q : 수녀와 가수, 둘을 합치면 ‘신의 아그네스’의 뮤지컬 버전이 되나요
사실 9년 전쯤에 윤석화 선배님이 ‘신의 아그네스’를 제작하실 때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었어요. 들어가려고 했는데 남자 배우가 늦게 캐스팅되는 바람에 연기가 되었다가 결국 못 올렸죠. 

 

Q : 어느덧 연예계 생활 15년, 후배들에게 해줄 조언도 생겼을 텐데요 
원래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요. 다들 열심히 하니 할 말도 없고. 다만 문화 게릴라로서 그 전쟁에 투입되었던 사람으로서 우리 후배들이 예전 환경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 상황인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후배들에게 말할 기회가 있을 때는 ‘일단 모든 것을 경험하고 네 목소리를 낮추라’고 조언해요. ‘왜 이런 걸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그 시간을 내 것으로, 내 경험으로 저장하라고요. 쓴 약 하나를 먹더라도 그 느낌을 잘 저장해두면 하다못해 ‘아, 너와의 이별이 약을 먹을 때처럼 썼어’라고 써먹을 수도 있잖아요. 

 

Q : 미래의 바다는 뭘 하고 있을까요
20대에 서른 살 이후엔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각오를 했고, 지금까지는 겨우 왔어요. 다시 10년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결혼해서 무난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디바’라는 단어, ‘언젠가 그녀는 디바였다’를 듣고 싶어 계속 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어요. 하지만 저는 오늘을 사는 여자거든요. 이 순간에 집중하겠다! 그런 각오로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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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주 ‘운명’을 이야기했다. 운명을 믿는 것이 굴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말할 때와 비슷한 감정이리라. 


흔히 ‘아이돌’이라고 하면 남의 손에 만들어진 연예인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유난히 강한 자의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형성해온 사람이었다. 원고를 완성할 때쯤 그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한 가지 중요한 얘기가 빠졌단다. “내년부터 스킨 스쿠버를 배울 거예요. 앞으로 바다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어요.” 대중문화의 디바는 다시 환경의 여전사로 화려하게 거듭날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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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현재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거림, 풍자와 위트를 뒤섞은 신랄한 문장 등 백 가지 무기로 현상을 해석하는 우리나라 톱 논객으로 꼽힌다. 그러면서 비행기 조종이 취미이고, 고양이 루비를 애지중지하는 감성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여성중앙에서는 ‘시대의 여자’들을 만나 섹시한 인터뷰를 펼쳐 보인다. 날 선 독설과 ‘루비 애비’ 특유의 감성을 넘나드는 인간 해석이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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